reve/ 2002년 자작시
꽃 아닌 꽃
발자국도 남지 않는 사람들의 길 위로
햇살이 미친개처럼 저희끼리 물어뜯고
저 뒹구는 꽃잎들, 이제는 꽃잎 아닌 꽃잎들
아직껏 끈적끈적한 껌 자국에 붙들리고
버려진 아해들과 나란히 앞구르기 뒤구르기하며
똑같이 짓밟히고 똑같이 더럽혀지며
언감생심 희망 따윌 믿느냐고 내게 묻는다
희망만 믿으려던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어서, 차라리 곱게 죽여주세요
휴지도 담배꽁초도 쓰레기통에 박아달라네요
이 도시의 변방에 저 소각장 보이시죠
몸뚱아리 썩혀볼 흙도 녹여볼 물도 없어
이 거리 저 거리로 사람들의 길 위로
치욕스런 윤회(輪廻)를 되풀이하느니
불씨 따라 연기 따라 열반에나 들렵니다
어서, 차라리 꽃봄은 곱게 물러가세요
이보게, 이제서야 꽃 아닌 꽃아
너를 나 나를 너라고 부를 줄 몰라
오로지 나를 나라고 부르는 내가
자네에게 무슨 대꾸를 해주겠는가
Tag/ 자작시
발자국도 남지 않는 사람들의 길 위로
햇살이 미친개처럼 저희끼리 물어뜯고
저 뒹구는 꽃잎들, 이제는 꽃잎 아닌 꽃잎들
아직껏 끈적끈적한 껌 자국에 붙들리고
버려진 아해들과 나란히 앞구르기 뒤구르기하며
똑같이 짓밟히고 똑같이 더럽혀지며
언감생심 희망 따윌 믿느냐고 내게 묻는다
희망만 믿으려던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어서, 차라리 곱게 죽여주세요
휴지도 담배꽁초도 쓰레기통에 박아달라네요
이 도시의 변방에 저 소각장 보이시죠
몸뚱아리 썩혀볼 흙도 녹여볼 물도 없어
이 거리 저 거리로 사람들의 길 위로
치욕스런 윤회(輪廻)를 되풀이하느니
불씨 따라 연기 따라 열반에나 들렵니다
어서, 차라리 꽃봄은 곱게 물러가세요
이보게, 이제서야 꽃 아닌 꽃아
너를 나 나를 너라고 부를 줄 몰라
오로지 나를 나라고 부르는 내가
자네에게 무슨 대꾸를 해주겠는가
more..
꽃의 아이들
흔해빠진 가로수도 저만치 떨어져 심는데 회색 담의 꽃들은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들어앉았다 불량콩나물 한두 자리쯤 비어도 눈치채지 못했다 화단의 나무팻말에 이끼가 끼듯 교문에 걸린 <도덕적이고 창조적인 민주시민 양성>은 시뻘겋게 녹슬었다 조회시간에 애국가는 잘도 따라 불렀건만 선생도 학생도 급훈을 몰랐다
담임은 기억력이 나빴다 석 달이 지나도록 제 반 꽃이름도 못 외웠지만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번호로 불려질 목숨이어니 이름 있는 꽃들은 일등 이등 삼등까지 나머지는 휴식시간 십 분을 위해 수업시간 오십 분을 견뎠다 점심시간 오십 분과 하교시간을 위해 열 다섯 시간을 무명초로 견뎠다
햇빛 대신 형광등을 쬐고 빗방울 대신 선생의 침방울을 마셔 꽃들은 무럭무럭 자라다가 엉덩이가 짓물렀다 선생들은 짓무른 자리에만 매를 댔다 국어를 북어로 고쳐놨다고, 영어단어를 못 외웠다고, 그 쉬운 공식조차 틀린다고 꽃들은 엉덩이가 퉁퉁 팅팅 부었다 부은 자리엔 어쩌다 꽃망울도 툭툭 터져 나왔다 아우성
선생은 염소와 호랑이 두 종류뿐이었다 염소는 꽃들이 떠들든 졸든 음매음매 혼잣말만 했다 호랑이는 언놈이 삐딱한 눈빛을 하면 게슈타포가 되었다 튀는 학생은 찍히고 튀는 선생은 잘렸다 교과서 밖 영어를 가르치던 청바지 여선생은 두 달도 못돼 쫓겨났다 국사선생이 교과서의 티를 지적하자 책벌레들이 외쳤다 시험에 나옵니까
누군가는 그랬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어른들은 그랬다 지금 공부해야 미래가 보장된다고 밤샘공부에 누래진 꽃들은 끼리끼리도 좋았지만 싱싱하고 새빨간 꽃이 보고팠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들은 가장 가녀린 꽃송이를 쓰다듬었다 기름 대신 오물로 세례하고 미사 대신 상소리로 축복했지만 선택받은 꽃은 옥상 아래서 시뻘건 넝마로 발견되었다
회색 담의 꽃들은 사물함의 책처럼 빽빽하게 들어앉았다 이따금 짓무른 엉덩이를 움켜쥐며 일어나기도 했다 문제풀이로 새까매진 연습장을 한 장 찢어 비행기를 날렸다 휘이익 날아가다간 곧바로 담벼락에 부딪쳐 곤두박질치곤 했다 저 담만 없다면 종이비행기를 타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까 따위의 농담은 농담일 뿐이었다 담 밑에 구겨진 종이비행기 위로 살풋이 내려앉은 민들레 홀씨 하나
고양이 길들이기
노예시장에서 만난 이웃이 한숨지며 말했다 제가 세 번 고양이를 키웠는데 골목에서 건져준 첫째 고양이는 열흘도 안돼 제 발로 골목으로 돌아갔다고, 노예시장에서 산 둘째 고양이는 새로 칠한 벽을 발톱자국으로 도배한 채 가출했다고, 친구가 건네준 셋째 고양이 검은고양이가 한식구가 된 뒤로는 꿈자리가 사나워지고 잘될 일도 안되었다고, 나는 고양이가 당신 같은 주인 만나 어지간히도 힘들었겠다며 고양이처럼 웃어주었다
나는 감히 고양이를 길들일게다 한끼를 굶겨도 지붕에 재워도 달아날 줄 모르게 골수까지 내 것으로 만들게다 놈에게 부처님의 미소를 보여줄지언정 눈빛만은 절대 들키지 않을게다 보름달을 보름달로 보지 못하도록 개조할게다 나의 키티에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족쇄를 채울게다 오래 전 보이지 않는 거인이 내게 그랬듯이
키티는 주인을 잘못 만났다 주인은 생선비늘만 만져도 온몸에 열꽃이 피어났다 바다보다 푸른 생선 등허리, 도시에서 흘러온 수많은 연인들이 똑같은 몸짓 똑같은 말로 맹세하는 백사장에서, 낯익은 이는 한줄기 악어눈물로 맹세를 저버렸고 낯선 이는 물먹은 고깃덩어리로 발견되었다 바다보다 비릿한 생선비늘을 주인은 맨손으로 만지지 못했다
플라스틱 선반에 참치캔이 차려 자세로 섰다 비늘 한 조각 없는 참치캔, 아침저녁으로 주인과 키티는 피차 좋은 게 좋은 거였다 150그램 노란 알루미늄캔만 보여주면 키티는 자다가도 개처럼 벌떡 일어났다 자 키티야 까칠한 비늘도 벗기고, 냄새 고약한 내장도 꺼내고, 목구멍을 찌르는 뼈도 발라내고, 비릿한 바다도 기름에 흠뻑 적셔 지워낸 150그램 순살 참치가 여기 있단다 이 고깃덩어리가 제 고향에서 어떤 녀석이었던가는 생각하지도 말고 그저 맛있게 먹으려무나
이제는 키티를 지붕 위에 재워도 문제없었다 밤새 초생달을 보고 반달을 보아도 아침이면 어제와 똑같은 참치캔을 찾아 주인 품에 안겨왔으니까, 그리고 보름밤 처음으로 커다란 울음소리가, 날것의 비명이 주인의 단꿈을 찢어발겼다 옳거니, 하필이면 밤하늘에 노란 알루미늄 참치캔이 덩그러니 걸릴 게 뭐야!
이젠 키티가 아닌 고양이, 그놈은 참치공장을 찾아 떠났을까, 혹은 뱃속의 죽은 참치에게서 살짝 엿들었을 바다를, 참치 떼가 발가벗고 뛰노는 바다를 찾아 떠났을까
하늘로 간 낙타
옥상 한가운데 빨랫줄에 매달린 하얀 몸뚱이에서
간밤에 누군가가 전봇대 밑에 싸갈긴 지린내에서
찌그러진 주전자의 이 빠진 주둥이에서
낮에만 울고 밤에는 뚝 그치는 공원 분수대에서
소리도 없이,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승천한다, 겨드랑이에 날개도 없이
어릴 적엔 포근한 솜사탕으로만 보이던 것이
빨랫감의 체념과
지린내의 수치와
주전자의 분노와
분수대의 울음을
하나둘씩 혹으로 달고
모래알 하나 없는 푸른 사막을
소리도 없이, 방울소리도 없이
가로지른다, 바람의 귓속말을 잘도 알아들으며
모래알 하나 없는 아스팔트 사막을 헤매던 누군가가
이따금, 아래로만 향해있던 고개를 치켜들어
역시 모래알 하나 없는 푸른 사막을 올려다볼 때마다
눈빛도 순한 낙타들은 그 누군가의 한숨도 덩달아 떠메고
선인장도 오아시스도 없는 길을 재촉할 것이다
간혹 축축한 바람 한줄기 불면
순한 귀에만 들린다는 방울 소리도 날 것이다
간혹 감당키 힘들만큼 무거워지면
탁 탁 탁 탁 톡, 낮은 발걸음으로
출발점인지 도착점인지 모를 자리로 내려갈 것이다
투명한 밤
이 밤, 특별한 일도 없는 밤
먼지 쌓인 스탠드를 조금 끌어당겨
오랜만에 불을 켜고
하얀 레이스 전등갓 대신 검은 비닐봉지를
스탠드 대머리에 모자로 씌워준다
검은 비닐에 먹혀
빛은 동생의 잠을 방해하지 못하고
오직 나와
내 손에 쥐인 펜만을 힘겹게 비춘다
내 좁은 방은 다행히도
창문만 열면 달과 별이 인사하는 곳
달과 별에 기도를 드리려거든
운 좋으면 마주칠 별똥별에 소원이라도 빌려거든
부옇게 흐린 유리창을 열고
유리창보다 더 차가운 밤바람을 초대해야 한다
이리 치고 저리 치인 돌멩이 하루
지쳐 느물느물해진 몸뚱이가
알싸한 바람에 번쩍 깨어나
훅, 하고 깊은숨을 내쉬면
쉬어빠진 숨, 잠깐 허연 유령이 되다가
부끄럽게 사라진다
이 밤, 베란다라든가 창문에 서서
쉬어빠진 한숨쉴 이들 또 있겠지만
몇백 몇천 허연 유령이 바람에 덧씌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늘한번 투명한 밤!
생일(生日)
왜 있잖아요 생일엔
어머니께 감사해야 한다지만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와
걸판지게 싸우고 나왔어요
할말 안 할말 다해가면서요
누가 그러는데 이만큼 나잇살 먹으면
찰밥에 미역국도 제 손으로 차려야 한다지만
누가 차릴 줄 몰라서 빵 먹었대요?
그런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음식은
먹기만 하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걸 보면
나 역시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생물일까요
생일엔 받는 게 아니라
한턱 크게 베푸는 것이라지만
당장 밥값한푼 없는 주제에
만나는 그 누구도 축하인사 없다고
유치원생처럼 심통도 났더랬지요
빈집에 와서 한 일이란 게
눅눅하고 포근한 책상 밑에 웅크려
머리카락 틈새마다 복병처럼 숨은
떡비듬을 털어내는 것이었지요
누래빠진 방바닥엔
먼지와 비듬과 머리카락이 숨죽여 울었고
그놈들의 숙주인 내가 있었지요
왜 있잖아요 생일엔
그저 내가 있음으로 감사할 일이라지만
울컥이는 밤거리로 나가
내 앞으로 줄지어선 커다란 촛불들이
온 거리를 비추는걸 보았지요
대학로에서
한때, 바리게이트는
전경과 시위대 사이에 있었다, 지금 그것은
황량한 광장과 붐비는 도서관 사이에,
피켓 구호대와 냉소하는 군중 사이에,
한물간 금서(禁書)와 반질반질한 토익서적 사이에,
외로운 대자보와 주목받는 구인광고 사이에,
있다, 한때는 누구에게나 보였으나 지금
어느 눈뜬 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는.
오랜만에 학교를 들른 어느 선배는
사라진 담쟁이가, 들리지 않는 통기타 소리가,
생존게임에 목 매인 젊음들이, 무기노릇을 못하는
낙엽이, 대화 없는 술자리가, 정치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무는 후배들이, 네온사인 아래의 토사물이
그저 두렵다 했다, 내가 알던 그 선배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는 건 나만의
헛된 기대였으리, 선배, 제발 솔직해지세요
그래, 솔직해지지, 사실은 세상이 두려운 거야,
바뀐 지 오래된 세상에 여전히 바뀌지 않는 내가
두려운 거야, 서른이 되어도 철들지 못한.
내년이면, 지긋지긋한 이곳과
'굿'바이는 못해도 '바이'바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만약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간다면, 만약 다시
어려진다면, 부질없이 마신 술을 모두 토해내리라
잔디밭에 널린, 엎드린, 찌부러진 꽁초며 병마개를
하나씩, 하나씩 주워보리라, 책보다 사람을
더 자주 보리라,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게 프로포즈하는 숱한 자유의 정체를
다시 한번 캐내 보리라, 만약 다시, 만약,
'만약'이 혀끝을 맴돌 만큼 헛되었던가, 나는.
기우(杞憂)
1.
전자레인지에서 갓 태어난 토스트에게
여느 날처럼 키스를 퍼붓다가
그놈의 바삭한 입술이 내 혀를 깨물기라도 하면,
남의 이목이 두려워
짙은 분으로 맨얼굴을 감추다가
분가루가 얼굴에 영영 달라붙어 버린다면,
립스틱 반지르르한 입술에서
난데없이 피비린내가 난다면,
고소라도 해야할까, 허나 그놈들이
<이년은 무슨 원한으로 으적으적 나를 씹나>
<어차피 지워버릴 거 왜 떡칠하냐>
<귀하신 몸을 감히 갈라진 땅에 눕히다니>
되려 맞고소하면 뭐라 대꾸할까
그러나, 오늘도 토스트는 얌전히 내 피와 살이 되고
덧칠한 얼굴은 맨얼굴보다 우아하고
장미색 립스틱에선 인공 체리향이 흐른다
2.
지하철역에 미친년이 어제처럼 그저께처럼
오늘도 자리 깔고 앉았다
사지 멀쩡한 년이 새까만 손톱으로
대가리를 북북 긁고 머리카락이 엉키고
새하얀 떡가루가 슈우욱, 낙하산 타고
내려가는데, 미친년의 건너편에서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으시오> 목쉰 영감의
신께서, 정말 이적이라도 행하신다면,
그년이 거인이 되어 하늘을 떠받치고
새하얀 송이송이 가루송이가 온 누리에 날린다면,
얼마나 재수 없을까, 그 미친년을 비웃던 우리가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제물을 바치며
<제발 머리만은 긁지 마옵소서> 애걸한다면,
허나 미친년은 미친년이므로 애걸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땅굴이라도 파고 밑바닥으로 내려앉을까
그러나, 그 신이 예수든 부처든 알라든
신은 제법 합리적이야
길 잃은 하나를 위해 멀쩡한 아흔 아홉을
외면하는 순간, 생글생글하던 아흔 아홉이
얼굴을 바꿔 신께 삿대질할 것쯤 알고 계시니까
3.
원탁 앞에 둥그렇게 둘러앉지만
원탁의 기사가 아니지
좀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열린> 토론을 위해
둥글게 둥글게 둘러앉으며
얼굴들은 잿빛으로 변하지만
부장은 오늘도 광대뼈가 불룩하다
그가 기껏 자기만이 아는 얘기를 떠벌리다가
약방감초 <최고의 경쟁력> 운운하자마자
그는 황금뿔잔을 치켜들고
얼굴들은 발가벗고 북을 친다 두둥둥 둥둥―
오늘의 사냥감은 멧돼지? 이웃부족 처녀?
포로들의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멍청이들, 너희의 몸뚱이는 우리의 밥이고
너희의 두개골은 우리의 트로피야
여기도 피비린내 저기도 피비린내, 성소(聖所)는 어디요?
이봐, 자네는 한마디도 않는군
이 시대에 그렇게 자기주장이 없어서야 쓰나?
아, 네, 저는, 여러분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합니다
동의는 무슨, 아직 아무 의견도 나오지 않았어
4.
극장,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
어둠 속으로 숨는 사람들, 뒤통수, 뒤통수만!
극장, 어둠 속에서 숨길 것 없는 사람들,
꼬마가 와작와작 씹다만 팝콘이 내 발치에 떨어지고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면 소리가 나지만
둘러보면 정작 뒤통수, 뒤통수만!
……주인공이 악당에게 악당이 주인공에게
아니, 이놈이 저놈에게 저놈이 이놈에게
총구를 들이댄다 무슨 총구가 대갈통 만해,
무슨 총구가 스크린 밖을 향해있어?
함정, 함정, 우리 모두 표적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싫으면 달아나라
누구 총 가진 사람 없소?
놈들을 쏘아라, 죽기 싫으면 죽여라
탕탕, 엔딩 자막이 뜨고 불이 켜진다
아무도 피 흘리며 신음하지 않는다
이전이고 지금이고 당신은 보았던가
총성이 썰물의 가슴을 스치는 것을?
저길 봐, 몇몇 뒤통수는
나가자마자 제목을 잊어버리네그려
5.
기우(杞憂)라니까
고민과 망상은 건강에 해로워
안심, 안심해, 들이쉬고 내쉬고,
따라해 봐, 휴우―
휴우(休憂)―
춤추네
죽어가는 형광등 밑에서 대가리 하나가 춤추네
기름떡 대가리 밑에서 두 어깨가 춤추네
오천원짜리 브래지어에 묶인 어깨 밑에서
두 팔이 춤추네 팔이 춤추면 손도 춤추네
뼈마디 불룩한 손아귀에서 젓가락 한 쌍이 춤추네
개도 주인 닮는다고 젓가락도 주인 닮아 등이 휘었네
휜 젓가락 밑에서 고등어 살점이 춤추네
어허 죽은 자가 감히 산 자 앞에서 춤추네
불경죄로 네놈을 뱃속으로 귀양보내겠네
뚝 떨어진 살점 밑에서 바라보네
소리 없이 벗겨지는 순간 살짝 떨리는
눈깔의 춤 흔들리는 지느러미의 춤 깜짝쇼
난쟁이 네모밥상 닳아빠진 모서리에
세상이 흔들흔들 외줄타기 춤을 추네
비가(悲歌)
당신, 어서 와요, 오늘도 바람이 당신 키보다 크네요, 당신이 늘 붙잡고 싶어하던 바람이, 애꿎은 나무를 툭툭 치며 당신을 약올리는군요, 그래 잘 지내기는 하나요, 잘 지내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이리도 축축하게 젖은걸 보니, 또 어디서 밤이슬이나 맞으며 헤매었나요, 그러게 누가 동무도 없이 다니랬어요, 당신 여전히 외톨이죠, 이런, 철철 흐르는 이것은 무엇인가요, 달빛에 꽂혔나요 가시나무에 찔렸나요, 가시나무 맞죠, 둥근 집을 감시하는 가시나무엔 익숙하다못해 지긋지긋한 냄새가 나는군요, 고달픈 단내가, 코끝이 시려요, 당신의 시퍼런 입김에 코끝이 시려요, 자, 푸념일랑 그만 접고, 식사는 제대로 하나요, 먹어도 먹어도 부르지 않다고요, 자, 당신이 좋아하는 볶음이에요, 벌레먹은 낙엽을 회오리바람에 볶은, 낙엽볶음이라고요, 어차피 지금 당신에겐 이런 것이 어울리니까요, 왜 화나요, 그렇게 화낸다고 하느님이 당신을 다시 풀어줄 리야 없잖아요, 당신은 가끔씩 춥다니 어둡다니 투덜대면 그만이지만 나는 화내는 법조차 잊었어요, 눈물 맛도 짠맛인지 쓴맛인지 기억이 아슴아슴해요, 나도 당신처럼 대놓고 투덜대보게, 내 밀랍 심장에 벌레 몇 마리만 집어넣어 줄래요, 벌레들이 피 맛에 길들여 막힌 심장에 길을 내도록, 치즈처럼, 스펀지처럼, 이 구멍 저 구멍 바람 술술 통하는 길을 내도록, 그 길로 수많은 당신과 내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흔해빠진 가로수도 저만치 떨어져 심는데 회색 담의 꽃들은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들어앉았다 불량콩나물 한두 자리쯤 비어도 눈치채지 못했다 화단의 나무팻말에 이끼가 끼듯 교문에 걸린 <도덕적이고 창조적인 민주시민 양성>은 시뻘겋게 녹슬었다 조회시간에 애국가는 잘도 따라 불렀건만 선생도 학생도 급훈을 몰랐다
담임은 기억력이 나빴다 석 달이 지나도록 제 반 꽃이름도 못 외웠지만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번호로 불려질 목숨이어니 이름 있는 꽃들은 일등 이등 삼등까지 나머지는 휴식시간 십 분을 위해 수업시간 오십 분을 견뎠다 점심시간 오십 분과 하교시간을 위해 열 다섯 시간을 무명초로 견뎠다
햇빛 대신 형광등을 쬐고 빗방울 대신 선생의 침방울을 마셔 꽃들은 무럭무럭 자라다가 엉덩이가 짓물렀다 선생들은 짓무른 자리에만 매를 댔다 국어를 북어로 고쳐놨다고, 영어단어를 못 외웠다고, 그 쉬운 공식조차 틀린다고 꽃들은 엉덩이가 퉁퉁 팅팅 부었다 부은 자리엔 어쩌다 꽃망울도 툭툭 터져 나왔다 아우성
선생은 염소와 호랑이 두 종류뿐이었다 염소는 꽃들이 떠들든 졸든 음매음매 혼잣말만 했다 호랑이는 언놈이 삐딱한 눈빛을 하면 게슈타포가 되었다 튀는 학생은 찍히고 튀는 선생은 잘렸다 교과서 밖 영어를 가르치던 청바지 여선생은 두 달도 못돼 쫓겨났다 국사선생이 교과서의 티를 지적하자 책벌레들이 외쳤다 시험에 나옵니까
누군가는 그랬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어른들은 그랬다 지금 공부해야 미래가 보장된다고 밤샘공부에 누래진 꽃들은 끼리끼리도 좋았지만 싱싱하고 새빨간 꽃이 보고팠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들은 가장 가녀린 꽃송이를 쓰다듬었다 기름 대신 오물로 세례하고 미사 대신 상소리로 축복했지만 선택받은 꽃은 옥상 아래서 시뻘건 넝마로 발견되었다
회색 담의 꽃들은 사물함의 책처럼 빽빽하게 들어앉았다 이따금 짓무른 엉덩이를 움켜쥐며 일어나기도 했다 문제풀이로 새까매진 연습장을 한 장 찢어 비행기를 날렸다 휘이익 날아가다간 곧바로 담벼락에 부딪쳐 곤두박질치곤 했다 저 담만 없다면 종이비행기를 타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까 따위의 농담은 농담일 뿐이었다 담 밑에 구겨진 종이비행기 위로 살풋이 내려앉은 민들레 홀씨 하나
고양이 길들이기
노예시장에서 만난 이웃이 한숨지며 말했다 제가 세 번 고양이를 키웠는데 골목에서 건져준 첫째 고양이는 열흘도 안돼 제 발로 골목으로 돌아갔다고, 노예시장에서 산 둘째 고양이는 새로 칠한 벽을 발톱자국으로 도배한 채 가출했다고, 친구가 건네준 셋째 고양이 검은고양이가 한식구가 된 뒤로는 꿈자리가 사나워지고 잘될 일도 안되었다고, 나는 고양이가 당신 같은 주인 만나 어지간히도 힘들었겠다며 고양이처럼 웃어주었다
나는 감히 고양이를 길들일게다 한끼를 굶겨도 지붕에 재워도 달아날 줄 모르게 골수까지 내 것으로 만들게다 놈에게 부처님의 미소를 보여줄지언정 눈빛만은 절대 들키지 않을게다 보름달을 보름달로 보지 못하도록 개조할게다 나의 키티에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족쇄를 채울게다 오래 전 보이지 않는 거인이 내게 그랬듯이
키티는 주인을 잘못 만났다 주인은 생선비늘만 만져도 온몸에 열꽃이 피어났다 바다보다 푸른 생선 등허리, 도시에서 흘러온 수많은 연인들이 똑같은 몸짓 똑같은 말로 맹세하는 백사장에서, 낯익은 이는 한줄기 악어눈물로 맹세를 저버렸고 낯선 이는 물먹은 고깃덩어리로 발견되었다 바다보다 비릿한 생선비늘을 주인은 맨손으로 만지지 못했다
플라스틱 선반에 참치캔이 차려 자세로 섰다 비늘 한 조각 없는 참치캔, 아침저녁으로 주인과 키티는 피차 좋은 게 좋은 거였다 150그램 노란 알루미늄캔만 보여주면 키티는 자다가도 개처럼 벌떡 일어났다 자 키티야 까칠한 비늘도 벗기고, 냄새 고약한 내장도 꺼내고, 목구멍을 찌르는 뼈도 발라내고, 비릿한 바다도 기름에 흠뻑 적셔 지워낸 150그램 순살 참치가 여기 있단다 이 고깃덩어리가 제 고향에서 어떤 녀석이었던가는 생각하지도 말고 그저 맛있게 먹으려무나
이제는 키티를 지붕 위에 재워도 문제없었다 밤새 초생달을 보고 반달을 보아도 아침이면 어제와 똑같은 참치캔을 찾아 주인 품에 안겨왔으니까, 그리고 보름밤 처음으로 커다란 울음소리가, 날것의 비명이 주인의 단꿈을 찢어발겼다 옳거니, 하필이면 밤하늘에 노란 알루미늄 참치캔이 덩그러니 걸릴 게 뭐야!
이젠 키티가 아닌 고양이, 그놈은 참치공장을 찾아 떠났을까, 혹은 뱃속의 죽은 참치에게서 살짝 엿들었을 바다를, 참치 떼가 발가벗고 뛰노는 바다를 찾아 떠났을까
하늘로 간 낙타
옥상 한가운데 빨랫줄에 매달린 하얀 몸뚱이에서
간밤에 누군가가 전봇대 밑에 싸갈긴 지린내에서
찌그러진 주전자의 이 빠진 주둥이에서
낮에만 울고 밤에는 뚝 그치는 공원 분수대에서
소리도 없이,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승천한다, 겨드랑이에 날개도 없이
어릴 적엔 포근한 솜사탕으로만 보이던 것이
빨랫감의 체념과
지린내의 수치와
주전자의 분노와
분수대의 울음을
하나둘씩 혹으로 달고
모래알 하나 없는 푸른 사막을
소리도 없이, 방울소리도 없이
가로지른다, 바람의 귓속말을 잘도 알아들으며
모래알 하나 없는 아스팔트 사막을 헤매던 누군가가
이따금, 아래로만 향해있던 고개를 치켜들어
역시 모래알 하나 없는 푸른 사막을 올려다볼 때마다
눈빛도 순한 낙타들은 그 누군가의 한숨도 덩달아 떠메고
선인장도 오아시스도 없는 길을 재촉할 것이다
간혹 축축한 바람 한줄기 불면
순한 귀에만 들린다는 방울 소리도 날 것이다
간혹 감당키 힘들만큼 무거워지면
탁 탁 탁 탁 톡, 낮은 발걸음으로
출발점인지 도착점인지 모를 자리로 내려갈 것이다
투명한 밤
이 밤, 특별한 일도 없는 밤
먼지 쌓인 스탠드를 조금 끌어당겨
오랜만에 불을 켜고
하얀 레이스 전등갓 대신 검은 비닐봉지를
스탠드 대머리에 모자로 씌워준다
검은 비닐에 먹혀
빛은 동생의 잠을 방해하지 못하고
오직 나와
내 손에 쥐인 펜만을 힘겹게 비춘다
내 좁은 방은 다행히도
창문만 열면 달과 별이 인사하는 곳
달과 별에 기도를 드리려거든
운 좋으면 마주칠 별똥별에 소원이라도 빌려거든
부옇게 흐린 유리창을 열고
유리창보다 더 차가운 밤바람을 초대해야 한다
이리 치고 저리 치인 돌멩이 하루
지쳐 느물느물해진 몸뚱이가
알싸한 바람에 번쩍 깨어나
훅, 하고 깊은숨을 내쉬면
쉬어빠진 숨, 잠깐 허연 유령이 되다가
부끄럽게 사라진다
이 밤, 베란다라든가 창문에 서서
쉬어빠진 한숨쉴 이들 또 있겠지만
몇백 몇천 허연 유령이 바람에 덧씌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늘한번 투명한 밤!
생일(生日)
왜 있잖아요 생일엔
어머니께 감사해야 한다지만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와
걸판지게 싸우고 나왔어요
할말 안 할말 다해가면서요
누가 그러는데 이만큼 나잇살 먹으면
찰밥에 미역국도 제 손으로 차려야 한다지만
누가 차릴 줄 몰라서 빵 먹었대요?
그런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음식은
먹기만 하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걸 보면
나 역시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생물일까요
생일엔 받는 게 아니라
한턱 크게 베푸는 것이라지만
당장 밥값한푼 없는 주제에
만나는 그 누구도 축하인사 없다고
유치원생처럼 심통도 났더랬지요
빈집에 와서 한 일이란 게
눅눅하고 포근한 책상 밑에 웅크려
머리카락 틈새마다 복병처럼 숨은
떡비듬을 털어내는 것이었지요
누래빠진 방바닥엔
먼지와 비듬과 머리카락이 숨죽여 울었고
그놈들의 숙주인 내가 있었지요
왜 있잖아요 생일엔
그저 내가 있음으로 감사할 일이라지만
울컥이는 밤거리로 나가
내 앞으로 줄지어선 커다란 촛불들이
온 거리를 비추는걸 보았지요
대학로에서
한때, 바리게이트는
전경과 시위대 사이에 있었다, 지금 그것은
황량한 광장과 붐비는 도서관 사이에,
피켓 구호대와 냉소하는 군중 사이에,
한물간 금서(禁書)와 반질반질한 토익서적 사이에,
외로운 대자보와 주목받는 구인광고 사이에,
있다, 한때는 누구에게나 보였으나 지금
어느 눈뜬 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는.
오랜만에 학교를 들른 어느 선배는
사라진 담쟁이가, 들리지 않는 통기타 소리가,
생존게임에 목 매인 젊음들이, 무기노릇을 못하는
낙엽이, 대화 없는 술자리가, 정치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무는 후배들이, 네온사인 아래의 토사물이
그저 두렵다 했다, 내가 알던 그 선배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는 건 나만의
헛된 기대였으리, 선배, 제발 솔직해지세요
그래, 솔직해지지, 사실은 세상이 두려운 거야,
바뀐 지 오래된 세상에 여전히 바뀌지 않는 내가
두려운 거야, 서른이 되어도 철들지 못한.
내년이면, 지긋지긋한 이곳과
'굿'바이는 못해도 '바이'바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만약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간다면, 만약 다시
어려진다면, 부질없이 마신 술을 모두 토해내리라
잔디밭에 널린, 엎드린, 찌부러진 꽁초며 병마개를
하나씩, 하나씩 주워보리라, 책보다 사람을
더 자주 보리라,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게 프로포즈하는 숱한 자유의 정체를
다시 한번 캐내 보리라, 만약 다시, 만약,
'만약'이 혀끝을 맴돌 만큼 헛되었던가, 나는.
기우(杞憂)
1.
전자레인지에서 갓 태어난 토스트에게
여느 날처럼 키스를 퍼붓다가
그놈의 바삭한 입술이 내 혀를 깨물기라도 하면,
남의 이목이 두려워
짙은 분으로 맨얼굴을 감추다가
분가루가 얼굴에 영영 달라붙어 버린다면,
립스틱 반지르르한 입술에서
난데없이 피비린내가 난다면,
고소라도 해야할까, 허나 그놈들이
<이년은 무슨 원한으로 으적으적 나를 씹나>
<어차피 지워버릴 거 왜 떡칠하냐>
<귀하신 몸을 감히 갈라진 땅에 눕히다니>
되려 맞고소하면 뭐라 대꾸할까
그러나, 오늘도 토스트는 얌전히 내 피와 살이 되고
덧칠한 얼굴은 맨얼굴보다 우아하고
장미색 립스틱에선 인공 체리향이 흐른다
2.
지하철역에 미친년이 어제처럼 그저께처럼
오늘도 자리 깔고 앉았다
사지 멀쩡한 년이 새까만 손톱으로
대가리를 북북 긁고 머리카락이 엉키고
새하얀 떡가루가 슈우욱, 낙하산 타고
내려가는데, 미친년의 건너편에서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으시오> 목쉰 영감의
신께서, 정말 이적이라도 행하신다면,
그년이 거인이 되어 하늘을 떠받치고
새하얀 송이송이 가루송이가 온 누리에 날린다면,
얼마나 재수 없을까, 그 미친년을 비웃던 우리가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제물을 바치며
<제발 머리만은 긁지 마옵소서> 애걸한다면,
허나 미친년은 미친년이므로 애걸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땅굴이라도 파고 밑바닥으로 내려앉을까
그러나, 그 신이 예수든 부처든 알라든
신은 제법 합리적이야
길 잃은 하나를 위해 멀쩡한 아흔 아홉을
외면하는 순간, 생글생글하던 아흔 아홉이
얼굴을 바꿔 신께 삿대질할 것쯤 알고 계시니까
3.
원탁 앞에 둥그렇게 둘러앉지만
원탁의 기사가 아니지
좀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열린> 토론을 위해
둥글게 둥글게 둘러앉으며
얼굴들은 잿빛으로 변하지만
부장은 오늘도 광대뼈가 불룩하다
그가 기껏 자기만이 아는 얘기를 떠벌리다가
약방감초 <최고의 경쟁력> 운운하자마자
그는 황금뿔잔을 치켜들고
얼굴들은 발가벗고 북을 친다 두둥둥 둥둥―
오늘의 사냥감은 멧돼지? 이웃부족 처녀?
포로들의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멍청이들, 너희의 몸뚱이는 우리의 밥이고
너희의 두개골은 우리의 트로피야
여기도 피비린내 저기도 피비린내, 성소(聖所)는 어디요?
이봐, 자네는 한마디도 않는군
이 시대에 그렇게 자기주장이 없어서야 쓰나?
아, 네, 저는, 여러분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합니다
동의는 무슨, 아직 아무 의견도 나오지 않았어
4.
극장,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
어둠 속으로 숨는 사람들, 뒤통수, 뒤통수만!
극장, 어둠 속에서 숨길 것 없는 사람들,
꼬마가 와작와작 씹다만 팝콘이 내 발치에 떨어지고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면 소리가 나지만
둘러보면 정작 뒤통수, 뒤통수만!
……주인공이 악당에게 악당이 주인공에게
아니, 이놈이 저놈에게 저놈이 이놈에게
총구를 들이댄다 무슨 총구가 대갈통 만해,
무슨 총구가 스크린 밖을 향해있어?
함정, 함정, 우리 모두 표적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싫으면 달아나라
누구 총 가진 사람 없소?
놈들을 쏘아라, 죽기 싫으면 죽여라
탕탕, 엔딩 자막이 뜨고 불이 켜진다
아무도 피 흘리며 신음하지 않는다
이전이고 지금이고 당신은 보았던가
총성이 썰물의 가슴을 스치는 것을?
저길 봐, 몇몇 뒤통수는
나가자마자 제목을 잊어버리네그려
5.
기우(杞憂)라니까
고민과 망상은 건강에 해로워
안심, 안심해, 들이쉬고 내쉬고,
따라해 봐, 휴우―
휴우(休憂)―
춤추네
죽어가는 형광등 밑에서 대가리 하나가 춤추네
기름떡 대가리 밑에서 두 어깨가 춤추네
오천원짜리 브래지어에 묶인 어깨 밑에서
두 팔이 춤추네 팔이 춤추면 손도 춤추네
뼈마디 불룩한 손아귀에서 젓가락 한 쌍이 춤추네
개도 주인 닮는다고 젓가락도 주인 닮아 등이 휘었네
휜 젓가락 밑에서 고등어 살점이 춤추네
어허 죽은 자가 감히 산 자 앞에서 춤추네
불경죄로 네놈을 뱃속으로 귀양보내겠네
뚝 떨어진 살점 밑에서 바라보네
소리 없이 벗겨지는 순간 살짝 떨리는
눈깔의 춤 흔들리는 지느러미의 춤 깜짝쇼
난쟁이 네모밥상 닳아빠진 모서리에
세상이 흔들흔들 외줄타기 춤을 추네
비가(悲歌)
당신, 어서 와요, 오늘도 바람이 당신 키보다 크네요, 당신이 늘 붙잡고 싶어하던 바람이, 애꿎은 나무를 툭툭 치며 당신을 약올리는군요, 그래 잘 지내기는 하나요, 잘 지내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이리도 축축하게 젖은걸 보니, 또 어디서 밤이슬이나 맞으며 헤매었나요, 그러게 누가 동무도 없이 다니랬어요, 당신 여전히 외톨이죠, 이런, 철철 흐르는 이것은 무엇인가요, 달빛에 꽂혔나요 가시나무에 찔렸나요, 가시나무 맞죠, 둥근 집을 감시하는 가시나무엔 익숙하다못해 지긋지긋한 냄새가 나는군요, 고달픈 단내가, 코끝이 시려요, 당신의 시퍼런 입김에 코끝이 시려요, 자, 푸념일랑 그만 접고, 식사는 제대로 하나요, 먹어도 먹어도 부르지 않다고요, 자, 당신이 좋아하는 볶음이에요, 벌레먹은 낙엽을 회오리바람에 볶은, 낙엽볶음이라고요, 어차피 지금 당신에겐 이런 것이 어울리니까요, 왜 화나요, 그렇게 화낸다고 하느님이 당신을 다시 풀어줄 리야 없잖아요, 당신은 가끔씩 춥다니 어둡다니 투덜대면 그만이지만 나는 화내는 법조차 잊었어요, 눈물 맛도 짠맛인지 쓴맛인지 기억이 아슴아슴해요, 나도 당신처럼 대놓고 투덜대보게, 내 밀랍 심장에 벌레 몇 마리만 집어넣어 줄래요, 벌레들이 피 맛에 길들여 막힌 심장에 길을 내도록, 치즈처럼, 스펀지처럼, 이 구멍 저 구멍 바람 술술 통하는 길을 내도록, 그 길로 수많은 당신과 내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by zizim | 2006/02/23 19:24 | trackback 0 | comment 0
